20180322
0. 얼마 전에 뮤지컬 레드북을 봤다. 이제서야 쓰는 감상.
1. 몇가지 연출과 대사들에 대하여 기억한다. 긴 시간의 극이라서 개인의 기억이 조금 틀릴 수 있음.
- 안나의 야한 상상. 하얀 천을 가지고 나와서 꿈, 상상이라는 몽환적인 느낌을 내면서 동시에 그걸 이불처럼 뒤집어 쓰고 침대 위에서 마구 천을 올려 치는데 그게 야한 상상이라는 말과 같이 섹스를 의미, 표현한다. 극의 분위기와 어울리는 유쾌함, 끈적임없는 야한 것, 그런 연출이 정말 좋았다.
- 남성을 성적대상화. 오히려 섹시하게 포즈를 취하는 것은 거의 남자 배우들이다. 여성도 얼마든지 야한 상상을 하고, 섹시한 것을 좋아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대사와 연기.
- 언어유희. 올빼미를 owl이라고 굳이 영어로 표현하여 부른다. 그것은 마치 늑대의 울음소리와 같고, 그것을 안나가 한다는 점에서 여성도 충분히 늑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표현한 듯. 또한 남성의 성기를 은유적으로 존슨이라고 부르곤 한다는 점에서 착안하여 그 캐릭터의 이름을 존슨이라 붙이고 노래를 한것. 그가 말하는 존슨이 자신의 성기를 말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어색하지도, 불쾌할 정도의 개그 코드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 검은 막을 내리고, 그 검은 천에는 구멍이 뚫려있어 뒤에서 조명을 쏘아 별로 표현한 연출.
- 이혼을 요구하는 재판장에서 브라운이 무대를 이동할때 조명이 계속 바뀌는 것. 뒤쪽에서부터 앞으로 쏘아 뒤의 재판장들이 잘 보이면서도 브라운에게 집중할 수 있도록 하는 연출.
- 뮤지컬은 확실히 연극보다 무대의 전환이 다양.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면서 사물을 움직이는 것이 어색하지 않아 조명이 있는 동안에도 계속 다양한 장면을 보여줄 수 있다.
- 로렐라이. 로렐라이. 로렐라이...라는 캐릭터는 잘 모르겠다. 한 남성이, 로렐라이라는 여성과 사랑했는데 그 여성이 자유롭게 섹스를 이야기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유언을 따라 여성들이 그럴 수 있는 공간을 만든 것은 분명. 그러나 왜 여장을 해야 했는가? 검은색의 의상은 상복의 의미라고 생각하지만 왜 여성의 드레스를 입은 걸까. 계속 궁금했다. 여성을 흉내내면서 동시에 신체는 남자라는 것을 감추지도 않고. 또 그게 이상하다고 지적하는 대사는 하나도 없으며. 그가 불편한 어느 장면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드레스를 입고, 갸냘픈 목소리를 내는 것. 그의 이름이 아니라 그녀의 이름을 가진 것. 그녀가 되고 싶었던 걸까?
- 첫 넘버에서는 '나머지'를 이야기한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나머지'가 아니라 '나'를 이야기한다. 그 차이. 변화.
- 브라운과 안나의 상상에서 안나에게 해적모자를 씌우고 칼을 쥐여주는 것. 브라운이 괴도이고 안나가 탐정인 것.
- '신사' 역의 배우들의 몸놀림이 무척이나 가벼워서 놀랐다. 그렇게 뛰려면 힘들 거 같은데 딱딱 맞아떨어지고 가벼워 보여서 볼때마다 유쾌.
- 좋아하는 대사.
'이해할수는 없어도 좋아할 수는 있잖아요. 왜 수염이 나고 나이를 먹는지 이해할 수는 없지만 난 나를 좋아해요.'
'더 이상 상상 속에만 머물지 않아. 나 같은 누군가에게 보여줄 거야. 조롱을 끌어안고 비난에 입을 맞춰. 나를 슬프게 하는 모든 것과 밤새도록 사랑을 나눠' - 프로그램북 발췌
'내가 나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내가 나라는 이유로 사라지는 티없이 맑은 시대에 새까만 얼룩을 남겨. 나는 나를 말하는 사람.' - 프로그램북 발췌
' 제2의 누군가가 아니라 제1의 내가 되세요.'
2. 프로그램북을 보다가 작가가 남성이라는 점에 놀랐다.
3. 남성으로만 가득찬 무대를 보다가 여성으로 가득찬 무대가 새롭다.
4. 그냥 유쾌하고, 보는내내 이토록 즐거운 극은 처음인 것 같은데 이토록 유쾌하게 극을 풀어내는 능력이 너무나 부럽고 존경스럽다. 유쾌한 위로극.
5. 언젠가 바랐던 것을 떠올렸다. 고등학교 때 처음 가졌던 꿈인데. 누군가를 위로할 수 있는 글을 쓰는 것. 왜냐면 가장 우울했던 시기에 유일하게 위로를 얻을 수 있었던게 책이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공지영 작가의 에세이에서 작가란 너뿐만이 아니야, 하고 그런 위로를 주는 사람이라고 적혀있던 글때문에 구체적으로 그것을 바랐다. (사실 그런 문구들을 적은 수첩이 있었는데 짐정리하면서 잃어버렸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지.) 뮤지컬과 연극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후에는 그런 극을 만드는 것도 바랐지만 내가 정말 할 수 있을까라는 문턱에 항상 발을 내딛지 못하는 꿈. 그러나 내가 가장 바라는 것. 그렇지만 다시금 되새겨본다. 언젠가는 할 수 있을 거라는 나의 작은 소망.